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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들의 이야기

한국전쟁 자료

by 질그릇_pottery47 2015. 3. 1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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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 [ 1 ]

 

♠아버지와 아들

서울 재 함락이 예견되던 1950년 12월 25일,

미 제24사단의 일선 중대장으로 근무 중이던

샘 워커(Sam S. Walker) 대위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로부터 긴급 호출을 당하였습니다.

 

전선을 떠나

도쿄의 극동군사령부를 서둘러 방문한

말단 야전 지휘관인 젊은 워커 대위는

맥아더의

집무실에서 거물과 마주하였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담담하지만 서운한 표정의 맥아더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워커 대위!

부친의 순직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훌륭한 군인이었던

월튼 워커(H. Walker) 대장(사후 추서)의

죽음은

우리 미국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나는 귀관에게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까지 운구하도록 지시한다."

 

1-1.jpg

[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대장의 묘 ]

샘 워커는

한국전쟁 초기에 미 8군 사령관으로

피 말리는 낙동강 방어전과 쾌속의 북진을

선두에서 이끌던

월튼 워커 중장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들 부자는

함께 전쟁에 참전 중이었는데,

이틀 전

아버지가 전선을 시찰하던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 하자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맥아더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구하도록 조치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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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한한 콜린스 미 육군 참모총장에게

아들 샘 워커를 소개하는 월튼 워커
그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

그런데

최고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일개 말단 지휘관 샘 워커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대며 반대 했습니다.

 

"각하!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이고

지금 부대는 후퇴중입니다.

후퇴 작전이 얼마나 어려운지

각하가

오히려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

중대장 교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서 부대를 지휘하겠습니다."

1-3.jpg

[ 당시는 1.4후퇴 직전이라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

 

처음 언급한 것처럼

1.4후퇴 직전이었던 당시는

일단

서울을 포기하기로 결정 하였지만

이후 어디까지 물러나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을 만큼 전황이

몹시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 받았을 만큼

저돌적이었던 샘에게,

그래서

갑작스런 후방 전보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것은 명령이다."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맥아더는

그의

충실한 수하였던 월튼 워커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하였습니다.

때문에

혹시나 최전선에서 사상을 당할 수도 있던

그의 유일한 혈육인 외아들을

안전한 본국으로 전보시킴과 동시에

유해를 직접 운구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유엔군사령관이라는

권력을 가진 자가 이들 부자에게

베풀 수 있었던 마지막 배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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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사실 그것은 배려였습니다.
(평양을 방문한 맥아더를 영접하는 월튼 워커) ]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던 샘 워커는

전선에 계속 남기를 자원하였지만

이처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워싱턴의 육군성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며

1977년에 미 육군 최연소 대장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또한

미 육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올랐던

아직까지

두 차례 밖에 없는 희귀한 예입니다.

이처럼 워커 부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형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별도 글을 맨 아래에 게시했음) 

 

1-5.jpg

[ 미 육군대장 당시의 샘 워커 ]

그런데

거대했던 한국전쟁에서

워커 부자처럼

공과 사를 구별하며 맡은바 책임을 다하였던

다른 예는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월튼 워커과 리지웨이에 이어

미 8군 사령관이 되었던 인물은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였는데,

당시에 그의 외아들인

밴 플리트 2세(James Van Fleet Jr.)

미 공군의 중위로 역시 참전 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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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아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그는 '한국 육군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군 현대화에 기여했던 인물입니다 ]

1952년 4월 2일,

밴 플리트 2세는 B-26 폭격기를 조종하여

평양 인근으로 출격했다가 실종되었습니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미 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가

직접 수색 상황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밴 플리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습니다.

 

"밴 플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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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3월 19일

부친의 60회 생일을 축하하는 밴 플리트 2세

그는 한 달 후

적진으로 출격하였다가 실종되었습니다 ]

아버지가

외아들의 구출작전을

너무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혼자 남아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써 단호한 명령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보기 힘든

그리고

상당히 어렵지만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밴 플리트 장군은 이처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밴 플리트에게

자기 가족의 편의를 봐달라는

권력자의 청탁이 들어왔습니다. ( 계속 )

 

■그들의 이야기 [ 2 ]

 

대통령 당선자의 부탁

1952년 12월,

수십 기로 이루어진

전투기 편대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VIP를 태운

수송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 내린 인물은

제2차 대전의 영웅이자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확정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였습니다.

 

그는 선거 기간 중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한국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즉시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이를

실천하려 온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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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 수도사단 담당 전선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 본토 밖의 최전선을 시찰한 것이

이번이

미국 역사상 최초였을 만큼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

연합군최고사령관이었던 오성장군답게

그는

능수능란하게 전선을 누비며

의견을 듣고 현황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전선을 총괄하는 미 8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령관이자 막역한 사이인 밴 플리트로부터

보고를 받던 중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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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8군 사령관 임무 완수 후 귀국한

밴플리트를 치하하는 아이젠하워 ]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조용히 듣던 아이젠하워의 의례적인 질문과

밴 플리트의 응답이 이어진 후,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문의를 하였습니다.

 

"장군,

내 아들 존(John S. D. Eisenhower)

지금 어디에서 근무하고 있습니까?"

 

당시

아이젠하워의 둘째 아들 존도

한국전쟁에 참전 중이었는데,

첫째 아들인 다우드가 어려서 병사하여

그에게는

외아들과 다름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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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대전 당시

아들 존과 함께 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따라서

이 질문은 아버지가 아들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지극히 사적 질문이었습니다.

 

밴 플리트는

"존 소령은 미 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중부전선 최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다음에 이어진

아이젠하워의 부탁을 듣고 순간 경악하였습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빼주시겠습니까?"

이는 바로

얼마 전에 작전 중 외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가 듣기에 몹시 거북한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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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에서 우로) 미 3사단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

공교롭게도 이들의 아들들은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

 

아이젠하워는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장군!

아들이 전사한다면

나는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포로가 된다면

적은 흥정하려들겠지만

결단코 응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고초를 겪는 대통령의 아들을 보고

이것은

미국의 자존심 문제라며

즉시

구출하라고 압력을 가한다면

장군들은 지휘에 애를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단지

대통령의 자식이 포로가 되었을 경우

차후

작전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최소한의 예방 조치만 요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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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3사단을 방문하여

아들 존 소령과 면담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아이젠하워의 말을 들은 밴 플리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크게 답하였습니다.

 

"각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존 아이젠하워는

후방의 정보처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고

이후

육군 준장을 거쳐

벨기에 주재 미 대사까지 부임하였습니다.

 

아이젠하워의 부탁은

대통령 당선자라는 지위를 남용한

명령이나 청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야전사령관에게

아버지가 아닌 대통령의 입장으로

 

공개 장소에서

당당하게 합리적인 의견 제시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또한

아이젠하워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한

밴 플리트의 화답도

단지

차기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보신책이 아니었음을 누구나 다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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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을 시찰하는 밴 플리트,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 ]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최고 지휘관과 그 아들이

동시에 참전하여 피를 흘린 경우는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휴전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과

그 아들

마크 빌 클라크(Mark Bill Clark) 육군 대위의 경우인데,

아들 빌은

금화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복무도중

전상을 당하여 전역하게 되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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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협정서에 유엔군을 대표하여 서명하였던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그의 아들도 전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처럼

고위직의 자제들이 앞 다투어

전쟁에 참전하였다는 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대목임에 틀림없습니다.

 

총 142명의 장성 아들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이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이 참전의사를 밝혔을 때

대부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계속 )

 

 

■그들의 이야기 [ 끝 ]

귀환하지 못한 이의 무덤


종종 11월이면

평안남도 양덕군 대유동에 있는

전몰 중공군 묘지를

백발의 중국 여인이 찾아오고는 하는데,

북한 당국이 나서서

그녀를 안내할 정도로 상당히 예를 갖춥니다.

 

류시지(劉思齊)라는 이 여인은

중국의 주석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첫째 며느리인데,

비록

현재 요직에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북한에서

이 여인에 대해 신경을 써야할만한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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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시지를 안내하는 북한 당국자 ]

왜냐하면

남편인 마오안잉(毛岸英)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여

그곳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을 획득하고 죽을 때까지

철권 통치자로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오쩌둥의 첫째 아들은

사실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일부 자료에는

자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참전 반대파의 의견을 누르기 위한

마오쩌둥의 지시로 그는 전쟁터로 나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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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안잉의 묘 ]

우리 입장에서

1950년 10월 25일 갑자기 등장한 중공군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았지만

그들의 참전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만약을 대비하여

18개 사(師)로 구성된 25만의 동북 변방군을

만주 일대에 배치해 두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중순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여러 외교 채널을 통해

전쟁에 개입할 것을

공공연히 천명하고는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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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참전은 갑작스러워 보였지만

내면에는 커다란 갈등이 있었습니다 ]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태도를

평가절하 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을 간신히 끝내고

국가를 건국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신생국이었으며

오히려

대만, 만주, 티베트 등 산적한 문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미국의 판단보다

중국이 더욱 심각하게 여기고 있던

난제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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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신생국이어서 국내에 산적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

 

바로 이때

스탈린이 참전을 권유하는 전문을 보내왔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소련의 적극 개입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마오는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면

스탈린이 적어도 공군을

참전시켜 줄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0월 12일,

소련의 적극 개입이

불가함을 통보 받은 마오는

만주에서 출병 준비를 하고 있던

펑떠화이(彭德懷)를 소환해

참전 여부를 재검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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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마오쩌둥의 결단으로 참전이 이루어졌습니다 ]

 

린바오(林彪)나 까오강(高岡) 등이

파병 유보를 주장했을 정도였고

상황도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오도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대국과 국경을 마주할 수 없다는

고대로부터의 원칙에 따라

파병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중공군의 참전은

마오의

전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오쩌둥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자

그의 장남을 참전하도록 조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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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

 

마오안잉은

그의 어머니인 양카이훼이(楊開慧)가

국공내전 동안

국민당군에게 피살당한 후

겨우 목숨을 건져 세상을 전전하다가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류시징와 결혼하였는데,

 

불과

1년도 못되어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하여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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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안잉과 류시지 ]

 

하지만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껄끄러웠던지 펑떠화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그의 참전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전선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였던

마오안잉의 요구와 달리

후방의 사령부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사령부가

미 공군의 맹폭을 받아 11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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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쩌둥은 대의를 위해

며느리의 소원을 거절하였습니다 ]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마오쩌둥은 잠시 눈시울을 붉혔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는

간단한 말만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류시지는

시신만이라도 중국으로 가져 올 것을

마오쩌둥에게 눈물로 부탁하였지만

수많은 중공군 전사자들과

형평이 마지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류시지가 아직도 북한에 있는

마오안잉의 묘소를 찾고는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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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아쉽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찾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

 

금까지 몇 회에 걸쳐

유엔군 최고지휘부와

중국 공산당 권력자의 가족이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피아를 떠나 지도층으로

모범이 되어줄 만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한국전쟁사에는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는 있는데,

 

막상

이와 관련한 우리의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by/[ august 의 軍史世界 ]


 

( ★관련글 참조↓별도 글 )

그의 손자들이 왔다


북진을 이끌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갑자기

등장한 중공군에 당황하였습니다.

 

명령을 내린다고

중공군을 막을 수 있던 상황이 아니었고

이제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단 하나,

 

최대한

후퇴 속도를 조절해 전선을 최대한 빨리

고착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워커는

전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그러던 1950년 12월 23일,

미 24사단과 영 27여단을 방문하려

의정부 북방으로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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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초기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

조만간

서울의 재포기가 예정되었을 만큼

상황이 나빴기 때문에

아군이 안전하게 후퇴하려면

이들 부대가 되도록

오래 동안 이곳을 방어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전 11시 경 워커가 탑승한 지프가

서울 도봉동 596-5번지 지점을 통과하여

의정부로 향할 때

 

반대편에서

남하하던 국군 6사단 소속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 사고로

그는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어려웠던 시기에

갑자기 닥친 엄청난 불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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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60주년을 맞아 2010년 12월

사고현장에서 벌어진 추모제 (사진-연합뉴스) ]

맥아더는

미 24사단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하던 외아들

'샘 워커(Sam S. Walker, 1925~)' 대위를 직접 불러

아버지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구토록 조치하였습니다.

 

아버지처럼

전형적인 무인이었던 샘은

한국에 남아

계속 부대를 지휘하겠다고 고집하였으나

맥아더는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이후 샘은

최연소 미 육군 대장에 올랐고

이것은 아직까지

미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오른

두 차례 밖에 없는 희귀한 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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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의 뒤를 이어 미 육군대장에 오른 아들 샘 워커 ]

 

워커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편인데

그 이유는

사실 그의 업적보다 호텔의 이름 때문입니다.

 

국내에 변변한 시설이 없어

휴가 때마다 일본이나 태국으로 놀러 가는

주한미군들을 유치할 목적으로

1963년 4월 한강변에 설립한 호텔을

워커 장군으로 이름을 따서

'워커 힐(Walker Hill)'로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쟁 영웅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미국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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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호텔로 자리매김한 워커힐 ]

하지만

그는 지난 한국전쟁 당시

가장 위태로웠던 낙동강전선을

성공적으로 사수한 맹장이었습니다.

 

그가 지휘한

미 8군과 국군의 분투가 있었기 때문에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역전타를 날리고

감격스런 북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중공군의 참전으로 통일의 꿈이 무산되고

그 또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한국전쟁 초창기에

그가 남긴 족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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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커는 정열적인 지휘관이었습니다 ]

그런데

호텔 이름이나 지명으로

자주 언급 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러한 인물이었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지난 6월 23일,

사망한지 60년이 지나고 나서야

용산 미 8군

사령부내에서 동상이 제막되었지만

이 또한

일반인들이 접하기 힘든 위치입니다.

 

맥아더 동상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 때문에

미군 당국에서

동상을 보호할 수 있는 장소에

세우기를 원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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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6월에 미 8군 영내에서 있었던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 (사진-연합뉴스) ]

그런데

최근 고인과 관련하여 반가운 이들이

한국을 찾은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바로 손자들인

'월튼 워커 2세(Walton Walker, Jr.)' 예비역 육군 대령과

'샘 워커 2세(Sam Walker, Jr.)'예비역 육군 중령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직업 군인이었던 워커 형제는 지난 10월 1일

한미동맹 체결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제1회 백선엽 한미동맹상 수상자로 선정된

故 월튼 워커 대장의 후손 자격으로

수상받기 위해 방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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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비에 헌화하는 월튼 워커 2세와

샘 워커 2세 형제 (사진-NEWSIS) ]

대를 이어 인연을 이어가는

워커 가문의 사람들을 보니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전 16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참전한 사실을

이해타산이나 국제정세 때문이라 분석하지만

그런 거창한 이론을 떠나

정작 전쟁터에 뛰어든 개개인에게는

매순간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속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겪어 주었던

많은

이들의 도움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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