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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년들아, 욕망의 바다에서 영원의 길을 찾는 구도자가 되라 / 이재철 목사

이재철목사

by 질그릇_pottery47 2019. 1. 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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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아, 욕망의 바다에서 영원의 길을 찾는 구도자가 되라

 

월간 [기독교사상] 8월호 원고입니다. / 이재철 목사

 

 

누가 문제인가?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킨 공범으로서의 우리 자신 말이다”(「내게 있는 것」, 115). 오늘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와 성경이 아니라 교회와 교인이 골칫거리이다. 특히 청년들에게 예수는 찬성하지만, 교회와 교인은 또 하나의 ‘오 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해야 할 교회가 도리어 방해거리가 되었단 말인가? 누가 영광의 복음을 이다지도 초라하고 비참한 나락으로 몰아넣었는가? 그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성경이 결코 불교신자나 이슬람교도에 의해 왜곡된 적이 없듯이 기독교와 그 신앙의 왜곡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는 사람들,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랑하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업적으로 맡았다는 성직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인간의 일생」, 162). 세상이 교회를 유혹하더라도, 타락의 책임은 전적으로 교회 자신에게 있다.

 

그럼에도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가 되자는 구호가 넘쳐나고 있다. 세상의 부패와 타락에 일조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저한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말은 결국 졸업식장에서 온갖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송사와 답사와 같다. 교회의 대 사회적 발언들이 도리어 냉소와 무관심으로 되돌아 올 때, 교회사의 개혁자들이 그랬듯이 기존에 정립된 모든 정답들에 대해 한번쯤은 의문부호 안에 넣어 두는 것, 그리고 전통과 역사, 현실이라는 외양을 제쳐두고 원초적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살 길이다.

 

본질을 회복하는 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설교자가 이재철 목사이다. 그의 외적인 공식 이력은 대략 다음과 같다. 홍성사의 창립자로,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로, 스위스 제네바의 선교사로, 그리고 지금은 개인 복음 전도자로 서울의 한 작은 교회에서 중고등학생들을 섬기는 교사이다. 이 여정에서 주목할 것은 성공할수록, 유명해질수록 자연스레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라면, 그는 이 공식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성사나 주님의교회나 제네바한인교회나 모두 성공한 경우이다. 그럼에도 그는 잘 나가는 자리를 훌훌 털고 유목민처럼 미련 없이 떠나 버린다. 마치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큰 일이라고 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의 자리에서 자신을 위한 영광의 자리로 변질되기 전에 얼른 그는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탁월한 자기 부인의 정신을 보여 준다.

 

그런 그가 현존하는 미래인 청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권의 청년 서신을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핵심 키워드는 하나는 버려야 할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추구해야 할 영원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를 하나로 종합해 주는 개념어는 바로 ‘회복’이다. 그러니까 회복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버려야 하고, 회복은 바로 영원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가 말하는 회복은 믿음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다(「회복의 신앙」, 8). 이런 경향은 그의 청년 서신의 후반부에 갈수록 강도를 더한다. 모두가 부자 되기를 꿈꾸는 세대를 지배하는 황제의 논리, 경제의 논리를 배격하고 십자가의 주님의 논리를 따르는 믿음을 강조하는 「내게 있는 것」, 그리고 다윗의 일생을 통해 신앙을 자기 야망의 도구로 삼는 것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진짜 크리스천, 프로 크리스천이 되기를 당부하는 「인간의 일생」에서 그 수위를 더 높이고 있다. 그리고 결단을 촉구한다. 그리스도만을 따르라고.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하겠다는 약속이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주님의 논리를 따르겠다는 고백이다. 경쟁자를 가차없이 짓밟고 최고 최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대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성공제일주의, 인간의 인격마저 물질로 가늠하는 황금만능주의로 대변되는 황제의 논리, 즉 매머니즘의 경제논리를 배격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논리 - 그 영원한 논리를 따르겠다는 결단”(「내게 있는 것」, 22)이다.

 

회심에서 회복으로

 

욕망으로부터 회심하여 본질을 회복하라는 그의 설교는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재철의 설교는 그의 자전적인 글인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의 반영이다. 모든 설교는 설교하는 자기 자신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가장 좋은 성경 번역본이 어머니가 읽어 주는 성경이라면, 가장 좋은 성경 해석은 신자 자신의 삶이라면, 가장 좋은 설교는 역시 설교자 자신의 삶이다. 설교자의 역할은 파수꾼이기도 하지만, 증인이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공적으로 증언한다. 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게 있는 것을 더하거나 감하지도 않고 전한다. 파이프가 물은 전달하되 자신의 삶과 인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나뭇가지는 가지를 흐르는 물로 인해 잎사귀가 푸르고 열매를 맺는 법이다.

 

그는 이 책에서 홍성사의 역사와 함께 구두 속의 돌멩이 같은 인생이 ‘산 속의 돌멩이’가 되어 생명과 축복의 통로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방탕한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았던 시간들이 역설적이게도 오늘 그와 설교를 형성하였다. 이 여로에서 주목할 만한 단어가 ‘욕망’이다. 그는 겉으로는 홍성사의 경영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기의 욕망이 들끓고 있었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구분하지 못했고, 육체의 욕심을 마치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도 그의 욕망을 교묘하게 위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다(「나의 고백」, 182). 그는 이제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에서 돌아서서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런 모습이 이재철 목사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내뿜은 설교는 청년들에게 큰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혹은 더 출세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매달린다”(「나의 고백」, 205). 지금의 청년들도 젊은 시절의 이재철 목사와 하등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성경과 하나님에게 투사한 다음, 그 투사된 욕망의 성취를 위해 매진한다(「인간의 일생」, 63). 하지만 그런 삶은 어리석다. 자기 스스로 만든 예수를 믿는 것은 헛되고 헛된 일이다. 육체의 소욕 추구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허상이요 안개다. 인생의 허비요 낭비다. “욕망과 본능의 자리에 집착하여 허망한 황제의 논리로 내 생의 귀한 부분을 어이없이 탕진한 것이다”(「내게 있는 것」, 132). 따라서 그의 설교는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육성고백인 셈이다.

 

하지만 단지 욕망을 버리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굽어진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어둠을 탓한다고 밝아지는 것이 아니다. 빛만이 어둠을 몰아낸다.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신자가 신자답게 되어야 한다. 조금 엉뚱한 질문을 하나 해 보자. 성경을 깨달아야 제자가 되는가? 아니면 제자가 되어야 성경을 깨닫는가? 예수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듣고도 듣지 못했던 것은 그 말씀이 지적으로 모순이 되거나 까다롭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그들이 모세로부터 말씀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고,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박해하였다. 이 질문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도 아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서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제자가 되지 않고서 어찌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은 상호 순환적이고 서로를 전제해야 하는 물음이다. 요는, 복음의 본질이 바르게 선포되어도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성경은 듣는 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먼저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성경 읽기와 설교 듣기, 그 외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자기 탐닉을 조장하고, 욕망을 가속화할 뿐이다.

 

본질의 회복을 추구하는 구도자

 

“모든 인간은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다”(「회복의 신앙」, 182)고 했다. 이재철 목사를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구도자가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 이재철 목사는 구도자이다. 실제로 그 스스로도 목회자를 구도자라고 정의한다.(「회복의 목회」, 89-95) 물론 산 속에 유리된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의 구도자이다. 하지만 이 구도자는 진리를 알지 못해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 - 그 진리와 생명의 도를 좇아간다는 의미에서의 구도자이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구도자는 진리를 찾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사는 자이다. 아침에 도를 듣고 죽어도 좋다고 믿는 공자의 제자가 아니라, 아침에 도를 듣고 하루 종일 도를 위해 살다가 저녁을 맞이하는 것이 예수의 제자이다.

 

구도자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야망과 비전은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교회는 “역사적으로 비전의 미명하에 망상을 좇았고 야망을 추구했다”(「청년아」, 73).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신실이고, 신실이란 본질에의 신실함이다.”(「참으로 신실하게」, 4)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영원히 살아 있는 진리와 목숨을 맞바꾸는 자들을 일컬어 우리는 믿는 이라고 부릅니다.”(「믿음의 글들」 취지문에서) 믿음은 자기 욕망과 이기심에 집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갈아엎는 것이다. 자기 욕망을 위해서 진리를 자신의 도구로 삼으려는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진리의 지배에 복종한다.

 

자기 욕심과 하나님의 뜻의 동일시는 하나님을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조종한다. 이는 「야베스의 기도」의 저자인 브루스 윌킨슨을 비교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재철 목사는 제네바에서 장신대 신대원 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윌킨슨은 중요한 강의를 위해 가는 길에 비행기를 놓칠 뻔하다. 이 상황에서 윌킨슨은 ‘주님, 비행기를 연착시켜주셔서 제가 탈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지간에 비행기는 연착했고, 그 결과 소피라는 한 여인을 인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도 응답은 윌킨슨에게는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한 자로 여기신다는 증거 자료이다. 이런 잘못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릇된 자아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힘과 능력, 즉 자기 자신을 하나님 위에 두고 있다”(「인간의 일생」, 171).

 

반면에 이재철 목사는 두 시간이나 늦게 비행기가 이륙해도, 도착 시간이 바뀌어서 가족과의 약속이 어그러지고, 트렁크도 제 때에 도착하지 않는, 완벽하게 꼬이는 상황이 인생의 기로에 서서 번민에 빠진 한 젊은이를 인도하려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주님의 섭리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그는 비행기가 빨리 떠나게 해 달라고, 가족이 도착 시간 전에 미리 나와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믿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윌킨슨이 자기 스케줄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시간표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는 기도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어떤 하나님이 윌킨슨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타고 여행하는 비행기를 멈추게 한단 말인가? 이재철 목사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자신을 맞출 뿐이다. 그 시간표에 따라서 만나게 된 한 젊은이를 돕는다. 이처럼 그는 “비성경적이고 그릇된 모든 인습이나 구습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 교회로의 회복”(「회복의 목회」, 65)을 외치며 그렇게 행동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말씀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말씀대로 사는 삶을 수반한다(「참으로 신실하게」, 18). 그리스도인에게 절대 가치는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욕망대로 살지 않는다.

 

하지만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대가를 요구한다. 말씀 때문에 최고와 최대가 되려는 꿈, 성공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최고와 최대가 아니라 영원이기 때문이다. 영원을 구하는 삶에게 성공은 배격해야 할 우상이며,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세상의 경제 논리로 보자면, 예수와 바울의 삶 모두 실패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참으로 신실하게」, 235-40). 그래도 우리는 크리스천이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 있으며, 성공과 실패와 상관없이 “크리스천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들이다”(「청년아」, 62). 상대가 무례하게 행해도, 성공과 승리의 가망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크리스천답게 행동해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본질에 신실하기 보다는 성공과 맘몬의 이름을 섬기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한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이용하려 한다.

 

“성장제일주의와 최고최대주의로 인해 말씀이 왜곡되고 있다. 황금만능주의와 세속주의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뿌리 깊은 기복주의로 인해 왜곡되고 있다. 이기적인 개교회간의 무한 경쟁으로 왜곡되고 있다. 교회의 폐쇄적인 조직 논리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직업적인 교역자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의 삶이 표리부동한 교인에 의해서도 말씀이 왜곡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의 역사 또한, 물론 신실한 말씀의 증인도 적지 않았지만, 그 큰 흐름이 왜곡의 역사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인간의 일생」, 171).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법이 없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슬로건은 지금도, 언제나 유효하다. 참된 구도자는 자신을 변화시킬 뿐, 하나님을 통제하지 않는다.

 

구도자는 자기를 부인한다.

 

영원의 진리를 이미 맛본 자는 현상의 세계를 게걸스레 탐식하지 않는다. 도리어 걸림돌로 여긴다. 소멸하는 세계에서 불멸하는 영원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세계가 허상임을 직시한다. 이런 것들은 마치 투우가 자기 죽을 줄 모르고 투우사가 흔들어 대는 붉은 깃발에 피가 끓어 날뛰다가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지는 꼴이다. 욕망뿐만 아니라 욕망하는 자아 역시 안개와 같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교회와 신자는 “궁전을 구축하는 곳이 아니라, 저마다 집착하고 있는 자기 욕망의 궁전을 허무는 곳이다”(「인간의 일생」, 8). 실제로 이재철 목사가 사용하는 예화는 자기 성취의 자랑을 하나님의 은혜인양 포장하는 여느 목사들의 예화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자기 욕심을 따라, 세속의 논리를 따라 살려는 청년들을 도리어 절망하게 한다. 자기 논리의 포기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부정해야 할 자기는 누구인가? 성서는 자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게서 언제나 문제되는 것은 자아의 자리 또는 방향에 있다. 바울은 인간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 하나는 ‘프뉴마’이다. 영혼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사르크스’이다. 이는 육체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소마’이다. 이것은 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에게서 이 세 단어는 한 실체를 지시한다. 모두 인간을 뜻하는 말들이다. 인간의 요소로서 영과 육의 이분법은 그의 안중에 없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인간이 주 안에 있으면 그는 프뉴마이다. 영생을 누린다. 하지만 사람이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는 사르크스이다. 썩어 없어질 존재에 불과하다. 바울은 한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프뉴마로, 세상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을 사르크스라고 표현했고, 이 양자를 통칭하여 소마라고 했다. 인간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땅의 것을 구하며 사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을 소망하는지 아니면 눈에 보이는 허욕을 갈망하는지에 따라 그는 프뉴마가 되기도 하고, 사르크스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가 부정하는 자아는 자아의 실체가 아니라 방향 또는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이란, 사르크스의 지양이자 프뉴마의 지향하는 소마가 되는 것이다.

 

이를 청년들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고지론과 미답지론에 적용해 보자. 이재철 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신자의 위치와 지점이 아니라 중심이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왜 그 자리에 서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낯선 이교도의 땅, 사로잡힌 땅, 바벨론 강가에서 다니엘은 고지에서, 에스겔은 미답지에서 하나님과 민족을 섬겼다. 낮은 곳에 서 있어도 그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으면 그는 사라질 사르크스이다. 높은 곳에 올라도 그가 지향하는 바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는 프뉴마이다. 어느 곳에서라도 하늘을 향해 기도의 창을 내는 청년이라면, 그는 영과 육이 통합된 소마, 곧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면, 무엇을 부인할 것인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2,000년 전 주님을 찾아왔던 청년은 오늘을 사는 청년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그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으며, 특정 인간일 수도 있고, 자신의 힘과 능력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기 위해,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심긴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온갖 열심을 다한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을 다한들 부족한 한 가지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신봉하려는 자기 자신을 ‘베레스 웃사’ 하는 것이다”(「인간의 일생」, 203). 그렇다. “오늘 이 시대는 투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 이 시대는 진실한 신자를 요구한다. 진실한 신자만이 누가 보든 보지 않던, 용기 있게 주어진 생명의 몫을 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용기의 사람을 통하여 이 땅의 역사를 바꾸어 가신다.”(「청년아」, 167).

 

구도자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변혁에 있다. 에베소서는 새 인간의 창조라고 선언한다. 새로운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이다. 이 관계 속에서 신앙이 표현되고 분출된다. 구도자라도 이 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스도교의 구도자는 다른 공간을 차지하거나 외적인 간격을 확보하지 않는다. 구도자는 공간과 거리가 아니라 내면의 중심과 지향 속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초월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

 

하나님과 나의 만남은 너의 배제가 아닌 나를 매개한 우리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재철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고독한 구도자의 모습을 취하지만, 너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자는 이웃을 인정한다. 하지만 온갖 신념이 자유롭게 소통되는 다종교, 다문화 사회에서는 충돌이 불가피하다. 갈등이 불거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컨대,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독교와 일반 사회와의 갈등과 충돌은 대개 복음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기에 미심쩍다. 타종교와의 갈등이건, 사회 정치적 충돌이건 간에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차이, 즉 진리의 대립이 아니라 신념의 대립일 따름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이 무례한 기독교인들의 행동 양식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표현 방식이다. 물리적 힘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권력에의 의지 앞에서 십자가는 그저 포개어 놓은 두 개의 작대기이다.

 

최소한의 시민적 소양도 갖추지 못한 교인들의 모습에 세상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것이다. 사소하게는 공공장소에서 신발 하나 제대로 벗어 놓지 않는 모습에서, 선교 여행 중에 대한항공 기내용 담요를 버젓이 들고 오는 모습에서, 성지 순례 중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보석을 들여오려는 모습에서, 비행기 승객으로 지켜야 할 예절을 스스럼없이 어기는 모습에서, 아이들이 호텔에서 요란하게 뛰어 다녀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 부끄러운 모습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예의범절을 갖추는 것이 더불어 사는 법이면서도 신자의 덕목이라는 점을 각인하게 된다(「인간의 일생」, 85-92).

 

이재철 목사의 설교가 단지 개인 윤리에만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 지평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분명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세상과의 분리 속에서, 즉 거리를 많이 확보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의해서 세상과 구별되며, 세상을 전복한다. 교회란 본시 어두운 세상과 분명하게 대조되는 대안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역사 참여는 세상의 것과는 다름에 틀림없다. 나라 사랑에도 그리스도의 향기나 절로 우러나는 법이다. 그는 잘라 말한다. 크리스천이 말하는 애국은 세상의 애국과 다르다.

 

“현해탄 저쪽 일본 사람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근대 일본의 기틀을 만든 위대한 애국자로 추앙하여 일본 지폐에 그의 얼굴을 새겨 넣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현해탄 이쪽 한국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 나라를 강탈했던 원흉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우리 나라에서는 애국 지사로 존경받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그들의 영웅을 죽인 폭도일 뿐이다. 만약 이런 것이 애국이요 애족이라면 이것은 결코 크리스천들이 추구할 애국 애족일 수는 없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애국 애족은 크리스천들의 추구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들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기에, 영원한 진리의 기초 위에서 추구하는 애국 애족이란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도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청년아」, 103-04).

 

이 대목에서 요한과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복음을 인간의 혈통과 전통에 제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특정 민족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인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랬기에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또한 지나치게 편협한 이기적인 민족주의는 일종의 우상숭배라는 것을 나치의 역사는 증명한다.

 

이 세상을 변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쟁이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살면 된다.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명목상의 신자로는 세상을 변혁할 수 없다. 자기를 변혁하는 자만이 세상을 변혁한다. 교회가 변화된 하나님의 공동체로 산 위에 우뚝 설 때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 삶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한다. 만약 우리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없다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주님을 볼 수 없다. 청년들이 그를 가장 잘 아는 삶의 현장, 곧 가정과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교회에서의 경건은 연기에 불과하다. “연기로는 결코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참으로 신실하게」, 227). 이처럼 “입으로 고백은 하면서도 자기 부인과는 전혀 동떨어진 채, 세속적 사고방식에 젖어 이기적인 기복주의자로 살아가는 현재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서는 전 국민의 25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가 교회에 다닌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은 새로워지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그 같은 우리로 인해 세상의 어둠과 혼란이 가중될 뿐일 것이다”(「내게 있는 것」, 58).

 

흔들리는 욕망의 바다에서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마저 황제의 논리, 세속의 논리에 사로잡혀 주님의 논리를 저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자기 배신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적당히 살라는 유혹을 받는다. 흔들리는 대로 자신을 맡기라고 부추긴다(「인간의 일생」, 338). 더 나아가 적당하게 살지 않고 꼿꼿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불편해 한다.

 

이 목사가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결코 들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말씀을 따라 산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별한다. 잣대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삶과 눈에 보이는 욕심을 따라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깎아 먹고 산 것으로 가늠한다. 신자와 불신자의 이분법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자신을 판 자와 자신을 위해 예수를 판 자의 구분이다. 신자는 세상이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말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가 아니다. 그렇고 그런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자다.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산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 자는 영원을 달리하게 된다.

 

오늘의 청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군중이 아니라 깨어 있는 한 인격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역사의 지평을 뒤흔드는 인간으로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현존하는 미래가 되고자 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 지금부터 진짜 크리스천으로 살고자 한다면, 욕망의 바다에서 영원의 길을 찾는 구도자가 되기를 결단한다면, 그는 반드시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이며, 구도의 여정에 동반자로 이재철 목사와 그의 청년 서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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